Lily 72.7x53cm Mixed media 2016

권유미 작가노트

권유미는 꽃을 그린다. 자신을 코딩하여 자기만의 이야기가 담긴 압축파일을 만든다. 그러니 그녀에게 은 또 하나의 자신이다. 권유미는 캔버스에 자신의 이야기를 입력해 밝고 화려한 꽃을 출력한다. 그녀가 한 터치 한 터치 붓을 움직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귀가 아니라 눈으로 들어야 한다.

 

그녀의 꽃은 진실이다. 지성의 혼돈이나 미망이 없다.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철학적 고뇌나 해괴망측한 상징기호를 숨겨놓고 보는 이를 농락하는 변태적 자학도 없다. 때로는 약간의 몽환(夢幻)’이 느껴지지만 그 역시 기분 좋은 편안함이다. 마치 엄마의 품안에서 졸고 있는 아이의 안락과 같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처음 대하면 一見終情, 한번 보고 빠져버린다. 비트켄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수사가 딱 맞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꽃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사족(蛇足)이란 것은 금방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꽃은 밝다. 암울, 우울, 독선, 냉소, 은닉, 음탕의 색깔을 순식간에 탈색시키는 강렬한 밝음이 있다. 그녀의 화병에는 외로운 꽃이 없다. 모든 꽃들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정겹다. 특별히 잘난 꽃도 없다. 크고 작은 꽃들이 중심과 주변으로 흩어져있지만 우열이 없다. 주인공과 소모품으로 구분되는 사람세상과 달리 모든 꽃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권유미의 꽃 세상은 편안하다. 부담이 없다. 색깔과 생김새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이다. ‘다름이 틀림이나 잘못됨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마치 서로 다른 음색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예()의 경지이다.

 

그녀의 꽃은 예(, , )이다. 화폭마다 고집스럽게 꽃을 채웠지만 그녀의 꽃은 수줍고, 겸손하고, 절제되어 있다. 꽃의 속살을 함부로 들추거나 헤집지 않는 , 정제된 언어로 격을 갖춘 , 감성적 인식의 노예가 되어버린 세속 미학을 초월한 를 갖추었다. 칼질하듯 꽃잎을 도려내지 않았다. 희로애락 인생사의 굽이굽이를 꽃 이야기로 지혜롭게 격상시켰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성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는 감동을 그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과묵한 인고는 격을 갖춘 을 출산했다.

 

그래서 권유미의 꽃은 꽃의 정수(精髓). 까닭에 꽃의 정체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크고 밝은 ’, 그것은 작가 권유미의 화신이다.

권유미의 꽃은 하나하나 선명하고 크다. 모두 싱싱하고 두터운 초록잎사귀 망토를 입어 더 화려하다. 순결한 규방처녀, 요조숙녀의 자태, 그러나 간절한 기다림의 갈망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녀의 꽃에는 범접할 수 없는 귀함과 신비함이 있다. 존귀하고, 신비롭고 그리고 미묘한 정감을 가진 꽃, 그것이 권유미의 꽃이다. 모든 꽃의 정수를 담은 유미(唯美)꽃이다.

 

권유미는 그런 그녀의 꽃을 화병에 담았다. 화려하고 귀한 화병이다. 어떤 것은 자개화병이고 또 어떤 것은 황금화병이다. 그녀가 그녀의 모든 꽃을 화병에 담은 것은 당위의 자연법칙이다. 화병에는 물이 있고, 물이 있는 꽃은 시들지 않는다. 화병은 그릇이고, 그릇은 성배(聖杯)의 상징, 성배는 모체(matrix), 자궁(uterus)의 상징이다. 그래서 화병은 꽃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모든 허물을 품을 수 있다. 화병은 꽃의 아름다움을 잉태하고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압축한 꽃을 화병에 꽂았다.

 

권유미는 화려하고 밝은 꽃을 화병에 꽂아 영원을 주었다. 마치 자신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꽃의 세상에서 풀고자 하는 바람, 이것을 권유미는 그녀의 에 압축하고 있다.

 

이정태, 정치학박사